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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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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시 프로덕션은 1961년 데즈카 오사무가 설립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이다. 1962년 법인으로 정식 출범하여 일본 최초의 30분 분량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철완 아톰》을 제작하는 등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선도했다. 데즈카 오사무 원작 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으며,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과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여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3년 도산 이후, 구 무시 프로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1977년 신 무시 프로덕션이 설립되었으나, 2022년 법원 판결로 인해 존폐 위기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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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 프로덕션 - [회사]에 관한 문서
회사 정보
이름무시 프로덕션
원어虫プロダクション
로마자 표기Mushi Purodakushon
약칭무시프로
로고
본사 위치도쿄도 네리마구 후지미다이
설립1961년 (원래 회사)
1977년 11월 26일 (재설립 회사)
창립자데즈카 오사무
산업일본 애니메이션
형태사기업
웹사이트무시 프로덕션 공식 웹사이트
해체1973년 (원래 회사)
추가 정보
설명"무시"는 일본어로 "벌레"를 뜻함

2. 설립 배경 및 초기 역사 (1961-1973)

1961년 데즈카 오사무도에이 동화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과 인맥을 바탕으로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 동화부"를 설립했다. 1962년 1월, 주식회사 무시 프로덕션으로 정식 발족했으며, "무시(虫)"라는 명칭에는 "만화의 벌레", "애니메이션의 벌레", "무사(不死身)"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5]

1962년 11월 5일, 첫 작품인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길모퉁이 이야기》와 《철완 아톰》 제1화를 공개했고, 같은 해 12월 주식회사로 법인 등록을 했다. 1963년 1월 1일, 일본 최초의 30분 방송 시간대용 연속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6] 《철완 아톰》을, 1965년에는 일본 최초의 컬러 본격 연속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정글 대제》를 제작했다.[7] 종업원 수는 최성기에 400명에 달했다.

1966년 7월, 무시 프로는 경영난 타개를 위해 사내 저작권부, 출판부, 영업부를 분리하여 자회사 무시 프로 상사를 설립하고, 본체의 채무를 이전했다. 1963년 무시 프로 상무로 취임한 아나미 카오루는 경영을 주도했지만, 1966년 12월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경영은 표류하게 되었다.[8] 아나미는 사망 직전 후지 테레비로부터 1.3억의 융자를 받는 대가로 무시 프로의 모든 작품 권리를 양도하는 계약을 독단으로 체결했다. 무시 프로는 후지 테레비와의 협상을 통해 1978년까지 10년간의 방영권을 후지 테레비가 점유하는 조건으로 권리를 되찾았다.[9][10]

초기에는 데즈카 원작 작품만 제작했으나, 이후 《애니멀 1》, 《방랑의 태양》, 《국마츠 님의 행차입니다》, 《아침의 조》 등 다른 작가의 작품도 애니메이션화했다. 데즈카 오사무 원작 작품이 2년간 없었던 것은, 바쁜 데즈카의 결재 및 리테이크 요청으로 인한 스케줄 지연, 비용 증가, 방송 차질 등의 무시 프로 내부 사정이 있었다.[11][12]

1971년 6월, 데즈카는 무시 프로의 향후 방침에 대해 "작가 집단 유지"와 "이익 추구 기업화" 중 선택을 묻는 사원 총회를 개최했다. 대다수 사원은 카와바타 에이이치 부장을 중심으로 이익 추구 기업화를 선택했고, 이에 실망한 데즈카는 사임했다. 카와바타가 사장에 취임하고, 자본금은 200만에서 1000만으로 증액되었으며,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9][14][15]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제작사 간 경쟁 심화, 인건비 급등, 자회사 무시 프로 상사의 경영 악화, 노동 쟁의, 극장용 작품 《슬픔의 베라돈나》의 흥행 실패 등으로 무시 프로의 자금 조달은 악화되었다. 1973년 8월 22일, 자회사 무시 프로 상사가 약 4000만의 부채를 지고 도산했다. 이후 은행 융자 중단으로 무시 프로 본체의 도산은 불가피해졌다. 결국 카와바타 체제의 무시 프로는 《원사 쿤》 방영 종료 직후인 1973년 11월 5일, 3.5억의 부채를 지고 도산했다.

2. 1. 데즈카 오사무와 무시 프로덕션 설립 (1961-1962)

1961년 데즈카 오사무도에이 동화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애니메이션 전문 프로덕션인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 동화부"를 설립했다. 1962년 1월, 이 프로덕션은 주식회사 무시 프로덕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무시(虫)"라는 이름에는 "만화의 벌레", "애니메이션의 벌레", "불사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5]

2. 2. 초기 작품 및 활동 (1962-1966)

1961년 데즈카 오사무가 설립한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 동화부'가 1962년 1월에 '주식회사 무시 프로덕션'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무시(虫)"라는 이름에는 "만화의 벌레", "애니메이션의 벌레", 그리고 "불사신(不死身)"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5]

1962년 11월 5일, 첫 작품인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길모퉁이 이야기》와 《철완 아톰》 제1화를 공개했다. 같은 해 12월, 정식으로 주식회사 법인 등록을 마쳤다.

1963년 1월 1일, 일본 최초의 30분 분량 TV 애니메이션 시리즈[6]인 《철완 아톰》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일본 최초의 컬러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정글 대제》를 제작하는 등,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7] 전성기에는 종업원 수가 400명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으며, 대부분의 TV 애니메이션은 후지 TV를 통해 방영되었다.

1966년 7월, 무시 프로덕션은 사내 저작권부, 출판부, 영업부를 분리하여 자회사인 '무시 프로 상사'를 설립하고, 동시에 본사의 채무를 이전했다.

《철완 아톰》의 성공을 이끌었던 만년사 출신의 아나미 카오루는 1963년 무시 프로의 상무로 취임하여 경영 개혁을 추진했지만, 1966년 12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8] 그의 사후, 무시 프로의 경영은 혼란에 빠졌다.[9][10]

초기에는 데즈카 오사무 원작의 작품만을 제작했으나, 이후에는 《애니멀 1》, 《방랑의 태양》, 《국마츠 님의 행차입니다》, 《아침의 조》 등 다른 작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도 제작했다. 데즈카 오사무 원작 작품이 2년간 제작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방송국 측에서 데즈카 작품을 선호하지 않았던 점, 바쁜 데즈카 오사무의 결재를 받기 어려웠던 점, 데즈카 오사무의 수정 요구로 인해 제작 일정이 지연되고 비용이 증가했던 점 등이 있었다.[11][12] 이러한 상황에서 무시 프로는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데즈카 오사무 원작이 아닌 작품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13]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제작된 실험 영화는 다음과 같다.

제작연도작품 제목
1962년길모퉁이 이야기
1962년남성
1964년기억
1964년인어
1965년담배와 재
1965년낙하
1966년전람회의 그림
1968년창세기


2. 3. 경영 위기 및 도산 (1966-1973)

1966년 7월, 무시 프로덕션은 사내 저작권부, 출판부, 영업부를 분리 독립시켜 자회사인 무시 프로 상사를 설립하고, 무시 프로덕션 본체의 채무를 이전했다.[8]

1963년 무시 프로덕션의 상무로 취임하여 경영을 이끌던 아나미 카오루가 1966년 12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경영이 표류하게 되었다.[8] 아나미 카오루의 사망 직후, 그가 후지 테레비로부터 1.3억의 융자를 받는 대가로 무시 프로덕션의 모든 작품 권리를 후지 테레비에 양도하는 계약을 독단적으로 체결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무시 프로덕션은 후지 테레비와의 협상을 통해 1978년까지 10년간의 방영권을 후지 테레비가 점유하는 조건으로 권리를 되찾았다.[9][10]

초기에는 데즈카 오사무 원작의 작품만을 제작했으나, 이후에는 「애니멀 1」, 「방랑의 태양」, 「국마츠 님의 행차입니다」, 「아침의 조」 등 데즈카 오사무 작품이 아닌 만화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데즈카 오사무 원작 작품이 2년간 없었던 이유는 텔레비전 방송국 측에서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쁜 데즈카 오사무에게 결재를 받기 어렵고, 데즈카 오사무의 수정 요청으로 인해 제작 일정이 지연되면서 비용이 증가하거나, 프로그램 방송에 차질이 생겨 과거 에피소드를 반복 방송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내부 사정으로 인해 데즈카 오사무를 제작에 참여시키지 않고 데즈카 오사무 원작을 사용한 작품을 만들지 않게 되었다.[11][12] 결국 「제로맨」, 「노먼」 등 데즈카 오사무 작품의 파일럿판을 제작해도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채택하지 않으면 무시 프로덕션을 유지하기 위해 데즈카 오사무 원작이 아닌 작품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13]

1971년 6월, 데즈카 오사무는 앞으로 무시 프로덕션의 방침에 대해 "초심대로 작가 집단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체로 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사원 총회를 열었다. 회의 결과, 대다수의 사원이 카와바타 에이이치 부장을 중심으로 이익 추구를 위한 기업 체제를 굳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에 실망한 데즈카 오사무는 그동안의 적자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사장에서 물러났다. 데즈카 오사무와 함께 퇴사하는 인재들이 잇따랐다. 사장에는 카와바타 에이이치가 취임하고, 자본금을 200만에서 1000만으로 증액했으며,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9][14][15]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덕션이 많이 설립되면서 다른 프로덕션과의 수주 경쟁에서 밀려 텔레비전국으로부터의 수주가 감소했다. 또한 인건비 급등으로 인해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다. 자회사 무시 프로 상사의 경영 악화와 노동 쟁의는 금융 기관이 무시 프로덕션 본체에 경계심을 갖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극장용 작품 「슬픔의 베라돈나」의 흥행 실패는 단기간에 자금 조달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1973년 8월 22일, 자회사 무시 프로 상사가 약 4000만의 부채를 지고 도산했다. 이후 은행 등으로부터의 융자가 중단된 것이 직접적인 도산의 계기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자회사의 도산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 프로덕션 본체의 경영 상태는 악화되어 있었다. 같은 시점에서 그해 9월에 방송이 종료되는 「원사 쿤」 이후의 제작 작품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했고, 이미 무시 프로덕션 본체의 도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카와바타 에이이치 체제의 무시 프로덕션은 「원사 쿤」 방송 종료 직후인 1973년 11월 5일에 3.5억의 부채를 지고 도산했다.

3. 주요 작품

무시 프로덕션은 1962년 11월 5일, 첫 작품으로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어떤 거리 모퉁이의 이야기》와 《철완 아톰》 제1화(흑백) 등을 공개했다.[5] 1963년 1월 1일에는 일본 최초의 30분 방송 시간대용 연속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6] 《철완 아톰》을, 1965년에는 일본 최초의 컬러 본격 연속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정글 대제》를 제작했다.[7]

초기에는 데즈카 오사무 원작 작품만을 제작했지만, 이후에는 《애니멀 1》, 《내일의 조》, 《국마츠 님의 행차입니다》, 《아침의 조》 등 데즈카 작품이 아닌 만화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11][12]

3. 1. 데즈카 오사무 원작 작품

무시 프로덕션은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 1963년: 일본 최초의 30분 분량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철완 아톰 방영 시작.[6]
  • 1965년: 일본 최초의 컬러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정글 대제 제작.[7]
  • 1967년: 리본의 기사 방영.
  • 1969년: 도로로 방영.

3. 2. 데즈카 오사무 원작 외 작품


  • 애니멀 1 (1968년 4월 1일 ~ 1968년 9월 30일)
  • 내일의 조 (1970년 4월 1일 ~ 1971년 9월 29일)
  • 안데르센 이야기 (1971년 1월 3일 ~ 1971년 12월 26일)
  • 슬픔의 벨라도나 (1973년 6월 30일)

3. 3. 실험 애니메이션 작품

1962년 11월 5일 무시 프로덕션의 첫 작품으로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어떤 거리의 이야기》와 《남성》이 공개되었다.[5] 이 작품들은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다.

1964년 9월 21일에는 《기억》과 《인어》 두 편의 실험 애니메이션이 추가로 공개되었다.[5]

1965년 10월 1일에는 《담배와 재》, 《낙하》와 같은 실험 영화들이 제작되었다.[5]

1966년 11월 11일에는 《전람회의 그림》이 공개되었다.[5] 이 작품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피아노 모음곡을 애니메이션화한 것이다.

1968년 10월 1일에는 《창세기》가 공개되었다.

4. 무시 프로덕션의 혁신과 유산

데즈카 오사무도에이 동화에서의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1961년 무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1962년 정식 발족한 무시 프로덕션은 "만화의 벌레", "애니메이션의 벌레", "무사(不死身)"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5]

무시 프로덕션은 1963년 일본 최초의 30분 TV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6]과 1965년 일본 최초의 컬러 TV 애니메이션 정글 대제[7]를 제작하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했다. 최전성기에는 400여 명의 직원을 둔 일본 최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중 하나였다.

초기에는 데즈카 오사무 원작 작품만을 제작했지만, 이후 애니멀 1, 방랑의 태양 등 다른 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도 제작했다. 이는 데즈카 작품 외 작품도 제작하여 회사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11][12][13]

1966년, 무시 프로 상사를 설립하여 저작권, 출판, 영업 부문을 분리하고 채무를 이전했다. 경영난 속에서 1971년 데즈카 오사무는 사임하고,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9][14][15] 결국 1973년, 무시 프로덕션은 3억 5천만 엔의 부채를 안고 도산했다.

4. 1. 등용 방식

도에이 동화에서는 대졸 정규직만 연출가가 될 수 있었고, 영화계 전체에도 신분 제도와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학력이 없는 사람은 정규직 채용 시험조차 볼 수 없었고, 비정규직으로 들어온 사람은 평생 비정규직으로 남아 감독 등 중요한 직책을 맡는 일은 없었다.[20]

이와는 달리, 무시 프로덕션은 데즈카 오사무가 개인의 작가성을 존중하고, 재능 있는 사람은 중용하는 당시 영화계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방침을 취했기 때문에, 학력이나 경력과 관계없이 많은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할 수 있었다.

4. 2.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 끼친 영향

무시 프로덕션(虫プロ)은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일본 최초의 30분 TV 애니메이션 제작: 1963년,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30분 분량 주간 연속 방영 TV 애니메이션인 철완 아톰을 제작했다.[6] 이는 흑백 작품이었으며, 1963년도 제2회 TV 기자회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 일본 최초의 컬러 TV 애니메이션 제작: 1965년에는 해외 수출을 고려하여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30분 분량 주간 연속 방영 컬러 TV 애니메이션 정글 대제를 제작했다.[7] 이는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1965년도 제4회 TV 기자회상 특별상, 1966년도 후생대신 아동복지문화상을 수상했다.
  •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 개발 및 보급: 애니메이션 제작 작업량을 줄여 매주 방영을 가능하게 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개발하고 보급했다.
  • 캐릭터 상품화 비즈니스 모델 확립: 무시 프로덕션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에 따른 캐릭터 상품화 비즈니스 모델은 이후 다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의 모델이 되었다.
  • 성인 대상 극장용 애니메이션 개척: 천일야화(1969), 클레오파트라(1970) 등의 성인 대상 극장용 애니메이션 작품을 개척했다.
  • 실험 애니메이션 제작: 극장용 아트 애니메이션 슬픔의 베라돈나(1973) 등 비상업적 기반의 실험 작품도 적극적으로 제작했다.


무시 프로덕션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가가 되라"는 주장에 따라, '실험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린 단편 비상업 작품들을 제작했다. 여기에는 『오스』, 『시즈쿠』, 『담배와 재』, 『창세기』, 『메모리이』 등이 포함된다.[27] 이러한 실험적인 작품 제작 경향은 데자키 오사무와 같은 연출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28]

무시 프로덕션 출신의 많은 인재들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활약하며 인재 육성 및 공급의 장이 되었다. 스기이 기사부로, 린타로, 나카무라 카즈코, 츠키오카 사다오,[20] 야마모토 에이이치, 아라키 신고, 키타노 히데아키, 무라노 모리미, 마사키 마모루, 데자키 오사무, 카나야마 아키히로, 스기노 아키오, 카와지리 요시아키, 다카하시 료스케, 토미노 요유키, 야히코 요시아키, 요시카와 소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4. 3. 사풍

무시 프로덕션(1963년 촬영)


창업자인 데즈카 오사무는 만화가이자 애니메이터였기 때문에, 무시 프로덕션은 "애니메이터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사풍이었다고 토미노 요시유키 등이 증언한다.[21][22][23][24][25][26] 데즈카는 애니메이터들에게 "작가가 되라"고 주장하며, 무시 프로덕션에서 "실험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렀던 『오스』, 『시즈쿠』, 『담배와 재』, 『창세기』, 『메모리』와 같은 단편 비상업 작품들을 제작했다. 무시 프로덕션 사내에서는 데즈카의 제안으로 20만 엔의 실험 작품 제작 지원 제도를 마련했다고 한다.[27]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제작에 몰두하느라 이 제도가 활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은 제작되었다. 상업성에 얽매이지 않는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하게 하는 취향은 데즈카가 무시 프로 상사에서 발간한 만화 잡지 COM과도 공통된 것이다. 데자키 오사무는 자신의 연출 지향성에 대해 "무시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실험적인 작품들의 정신을 상업 작품에서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라고 훗날 말했다.[28]

한편, 이러한 애니메이터 중심의 사풍은 비합리적인 경영과 인건비 급증을 초래했다. 무시 프로덕션에서 독립한 영업·제작 계열 스태프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선라이즈는 무시 프로덕션의 실패를 교훈 삼아 크리에이터를 경영에 관여시키지 않는 방침을 정하고, 제작 진행 등 관리 업무 이외의 실제 제작 작업은 외주 스태프에게 맡기는 방식을 채택했다.

4. 4. 비즈니스 모델

무시 프로덕션은 제작 프로덕션으로서 방송국으로부터 받는 제작비가 실제 발생한 경비보다 훨씬 적었다. 이러한 적자를 관련 상품의 저작권 수입(머천다이징 수입)과 해외 수출로 메우는 일본 TV 애니메이션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한 것은 구형 무시 프로덕션이다.[29] 디즈니를 본뜬 이 모델은 저작권 사업의 부수입으로 다른 회사의 진입을 허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구형 무시 프로덕션은 작품의 저작권을 방송국에 넘기지 않는 전략을 택했다. 당시에도 그러한 형태의 작품은 존재했지만, 무시 프로덕션의 경우 머천다이징 수입 없이는 제작비 회수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저작권을 넘기지 않았다. 판권부를 설치하여 자사 작품의 저작권 관리를 했다.[29]

또한, 기획·각본·캐릭터설정부터 동화, 채색, 녹음 등 모든 공정을 사내에서 수행하는 내제 시스템을 채택했다. 이 방식으로 작품을 빨리 완성하고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다른 프로덕션이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수주 경쟁에서 밀려나고, 모든 스태프에게 기본급을 지급해야 하는 내제 시스템의 한계로 인해 구형 무시 프로덕션은 도산했다.[30]

5. 무시 프로덕션 출신 주요 인물

데즈카 오사무가 설립한 무시 프로덕션은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곳을 거쳐 간 스기이 기사부로, 린타로, 데자키 오사무, 토미노 요시유키, 야스히코 요시카즈등 많은 인재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1. 주요 인물

무시 프로덕션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5. 2. 관련 애니메이션 제작사

데즈카 프로덕션, 선라이즈, 매드하우스는 무시 프로덕션 출신 인물들이 설립한 애니메이션 제작사이다.[14][30] 교토 애니메이션도 무시 프로덕션과 관련이 있다.

6. 신 무시 프로덕션 (1977-현재)

'''무시 프로덕션 주식회사'''는 일본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이다. 구 무시 프로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며,[47] 본사는 도쿄도네리마구 후지미다이 2-30-5에 있다.[48] 일반사단법인 네리마 애니메이션 이사이다.

주로 상영회 형식·가족 영화를 위한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작품은 데즈카 오사무가 재건 협력의 일환으로 기획·감수로 참여한 1986년의 『원더비트S』가 유일하며, 원작 없는 오리지널 작품이기도 하다.

무시 프로덕션은 데즈카 프로덕션과 자본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기업이지만, 데즈카 오사무와 공동으로 애니메이션 작품을 제작한 적이 있어 양사 간에는 데즈카 자신이나 작품을 통한 관계가 존재했다.

전국노동조합총연합 산하 영상·문화 관련 산업 노동조합의 사무소는 2008년까지 무시 프로 사내에 있었고,[49] 위원장은 사원인 아리하라 세이지가 역임했다.[50]

6. 1. 설립 배경 및 초기 활동

1977년, 구 무시 프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무시 프로덕션이 설립되었다.[47] 당시 최대 주주는 노동조합으로, 자본금 12억 중 5억을 출자했다. 일본 헤럴드 영화가 3억, 닛카쓰가 2억, 기타 2억을 출자했다.[47]

데즈카 오사무는 회사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구 무시 프로 시절 제작한 상업 애니메이션 작품의 저작권을 모두 신 무시 프로에 양도했다.[48] 이에 따라 구 무시 프로 작품의 저작권 관리 역시 신 무시 프로의 주요 업무가 되었다.

6. 2. 주요 작품


  • 원더 비트 스크램블(1986)[48]
  • 북극의 무시카 미시카(1979)
  • 이세만 태풍 이야기(1989)

6. 3. 현재 상황

2018년, 사장 이토 사토시가 사망하면서 콘텐츠 제작 회사 "코코로 프리"의 대표 나카무라 아키히가 경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를 기점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사업을 중단했다.[51] 아침의 조(제1작)의 저작권이 톰스 엔터테인먼트로, 데즈카 오사무 원작 작품의 저작권이 데즈카 프로덕션으로 이관되는 등, 구 무시 프로 작품의 저작권도 이토가 사망할 때까지 헐값에 매각되었다.[51]

경영진이 바뀐 후, 신 무시 프로의 수입원은 간신히 남은 작품의 저작권 관리와 교육 영화 통판 사업뿐이었으며, 경영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51] 2019년에는 사람들의 출입도 드물어졌고, 임대료 지불도 체납되었다.[51] 상속인인 데즈카 에츠코(데즈카 오사무의 부인)의 거듭된 독촉에 경영자는 "회사 재생 계획을 작성하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답변했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51] 결국 상속인과 신 무시 프로의 협상은 결렬되었고, 장기간 미지급된 임대료 약 1148만의 상환과 건물 명도를 요구하는 소송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이 2021년 10월 일부 언론 보도를 통해 밝혀졌다.[51] 도쿄 지방 법원은 2022년 7월 12일에 상속인 측의 주장을 인정하여 회사에 명도와 임대료 지불을 명령했다.[52]

7.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에 미친 영향

1980년대 중후반, 한국의 여러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청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신 무시 프로덕션은 한국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했다.[1] 1987년, 대원동화(현 대원미디어)는 신 무시 프로덕션과 기술 제휴를 맺고, 《원더 비트 스크램블》 제작에 참여했다. 이는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일본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제작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첫 사례였다.[1]

이외에도, 세영동화(현 ㈜동우에이앤이)는 1988년, 신 무시 프로덕션의 《불의 비가 내린다》, 《이세만 태풍 이야기》 등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했다.[1] 이러한 협력은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의 기술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Home http://www.mushi-pro[...] 2012-03-15
[2] 논문 Managing the unmanageable: Emotional labour and creative hierarchy in the Japanese animation industry 2014-08-19
[3] 웹사이트 Tezuka’s Life (1958-64) https://tezukainengl[...] 2024-12-05
[4] 웹사이트 The Japanese Studios of Rankin/Bass https://cartoonresea[...] 2014-04-14
[5] 서적 手塚治虫物語 漫画の夢、アニメの夢
[6] 문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목록
[7] 문서 후속작 목록
[8] 서적 鉄腕アトムvs鉄人28号 僕たちの「少年」時代 WAVE出版 1993
[9] 서적 日本アニメーション映画史 有文社 1977
[10] 서적 手塚治虫 ぼくのマンガ道 新日本出版社 2008
[11] 서적 虫プロ興亡記 安仁明太の青春 新潮社 1989
[12] 서적 秘密の手塚治虫 太陽企画出版 1980
[13] 서적 富野由悠季全仕事 キネマ旬報社 1999
[14] 서적 秘密の手塚治虫 太陽企画出版 1980
[15] 서적 虫プロ興亡記 安仁明太の青春 新潮社 1989
[16] 뉴스 日刊スポーツ 1973-05-01
[17] 뉴스 サンケイスポーツ 1973-05-05
[18] 문서 阪神ジャガーズに関する記述
[19] 문서 팀명 변경 경위
[20] 문서 월가의 이력
[21] 서적 あなたもSF作家になれるわけではない 徳間書店 1979
[22] 서적 増補改訂版 だから僕は… 徳間書店アニメージュ文庫 1983
[23] 서적 ターンエーの癒し 角川春樹事務所 2000
[24] 서적 ドキュメント・ボトムズ 高橋良輔アニメの世界 三一書房 2000
[25] 서적 虫プロてんやわんや 誰も知らない手塚治虫 創樹社美術出版 2009
[26] 서적 小説手塚学校2 ソロバン片手の理想家 日本動画興亡史 講談社 2009
[27] 서적 虫プロ興亡記 安仁明太の青春 新潮社 1989
[28] 방송 アニメ「あしたのジョー」ができるまで 2007-03-28
[29] 서적 あなたもSF作家になれるわけではない 徳間書店 1979
[30] 문서 기획 프로덕션의 인력 구성
[31] 웹사이트 インタビューとは何か。01 塩野米松さん篇 https://www.1101.com[...] 2023-02-13
[32] 간행물 担当編集者座談会――われら『手塚番』不眠不休の“超人”とつき合った日々 朝日新聞社 1989
[33] 서적 テレビ・アニメ最前線 私説・アニメ17年史 大和書房 1980
[34] 서적 「ダメ!」と言われてメガヒット 名作マンガの知られざる制作現場 東邦出版 2003
[35] 서적 虫プロ興亡記 安仁明太の青春 新潮社 1989-04
[36] 서적 「宇宙戦艦ヤマト」をつくった男 西崎義展の狂気 講談社 2015
[37] 간행물 アニメック 1987-01
[38] 서적 アメリカで日本のアニメは、どう見られてきたか? 徳間書店 2003
[39] 문서 虫プロダクション資料集 1962-1973
[40] 서적 アメリカで日本のアニメは、どう見られてきたか? 徳間書店 2003
[41] 서적 TVアニメ25年史 徳間書店 1988
[42] 문서 ビデオグラムのパッケージ展開におけるアニメラマ三部作とアニメロマネスク
[43] 판례 損害賠償請求事件 東京地裁昭49(ワ)3093号 最高裁判所事務総局編集、財団法人法曹界 1984
[44] 서적 虫プロ興亡記 安仁明太の青春 新潮社 1989-04-15
[45] 서적 (제목 없음) 1989
[46] 서적 (제목 없음) 1989
[47] 간행물 1527日―虫プロ再建への歩み 1979-08
[48] 웹사이트 (제목 없음)
[49] 웹사이트 映産労の事務所が引越し https://anirepo.exbl[...] 2008-12-20
[50] 웹사이트 映産労のご案内と加入申込書 https://eisanro.exbl[...] 2005-10-17
[51] 웹사이트 手塚治虫の未亡人が「虫プロ」を提訴 経営危機で家賃を2年間滞納 https://www.dailyshi[...] 2021-10-17
[52] 웹사이트 「虫プロ」に明け渡し命令 賃料未払い、東京地裁 https://www.iza.ne.j[...]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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